가슴속의 말을 불러낸 ‘줄탁啐啄’의 순간들, 작가 김장성의 그림책 이야기

알 속에서, 맺힌 목숨이 조금씩 자란다. 뼈가 생겨나고 살이 돋고 피가 돌고, 사지와 머리가 형체를 갖추어 간다. 이윽고 목숨은 알 속에 꽉 들어찼다. 꽉 찬 목숨이 밖으로 나가고자 꿈질거리며 껍데기를 쪼려고 안간힘쓰는 그때, 알 밖의 부리가 같은 곳을 콕 쪼아 준다. 순간 알이 깨어지고, 웅크렸던 목숨은 젖은 몸을 뒤척이며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다. ‘줄탁동기啐啄同機’의 드라마, 병아리의 탄생이다.
제자의 성장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내는 스승의 지혜를 비유하는 이 사자성어는, 안팎의 조응으로 어떤 일이 성사되는 모양을 뜻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아니 그러하랴마는, ‘줄탁’의 드라마는 창작의 순간에도 일어난다. 가슴 속에서 맺혀 자라난 말들… 하고픈 말들이 꽉 차올라 아우성칠 때 바깥의 무언가가 콕 쪼아 주면, 그 순간 말은 알을 깨고 나와 원고지에든 화판에든 오선지 위에든 꿈틀꿈틀 제 모습을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내 가슴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 그림책을 이룬 말들, 그것들은 어떻게 맺히고 차올라 무엇의 ‘탁啄’을 받아 알껍데기를 깨뜨리게 되었나.

‘탁’ 하나, 틈새에 피어난 민들레 꽃다발 – <민들레는 민들레>

민들레를 보았다. 육중한 쇳덩이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다니는 10차선 자동차전용도로의 중앙분리대 틈새에서, 흙먼지와 타이어 가루, 매운 배기가스의 분진이 모여 이루었을 한 줌 토양에 뿌리를 박고 모가지를 뻗어 노란 꽃송이를 피운 한 무리 민들레를. 2005년 4월의 어느 날 이른 오후, 자유로를 달리다 차창 밖으로 보았다.
그때 나는 어느 출판사의 편집노동자였다. 어떤 노동인들 귀하지 않으랴. 그러나 세상은 사람을 노동의 틀에 가둬두려는 경향이 있으니, 종종 취기를 빌어 양자택일을 종용하는 동료가 있었다. “당신은 편집자요, 작가요? 정체를 분명히 하시오.” 외근을 나가는 길에 직장을 그만둬야 할까 고민하며 차를 몰던 중이었다.
척박한 틈새에서 피어난 민들레를 보며, 안쓰럽다가 미안하다가 문득 고마웠다. ‘나 이런 곳에서도, 이렇게 꿋꿋하게 꽃 피워 냈다. 그러니 너도…’ 위로의 몸짓인양 싶었다. 격려의 꽃다발인 듯도 싶었다. 오래 간직하고파, 분리대 가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미지는 마음속에서 노래가 되었다.

민들레는 민들레 / 여기서도 민들레 / 저기서도 민들레 / 이런 곳에서도 / 민들레는 민들레…

내가 나에게 불러주는 노래였다. 어디 있어도 너는 너이니, 흔들리지 말고 너답게 살아라. 누가 뭐래도 너는 너이니, 그저 너답게만 살아라.

혼자여도 민들레 / 둘이어도 민들레 / 들판 가득 피어나도 / 민들레는 민들레…

외롭더라도 너는 너이니, 약해지지 말고 너답게 살아라. 무리를 이루어도 너는 너이니, 뻐기지 말고 너답게 살아라.
오래지 않아 민들레는 하얀 씨가 되어 여기저기 홀홀 퍼져 갔다. 나도 나누고 싶었다. 그 노래, 그 이미지. 내가 몸담은 작가 공동체의 오현경 작가가 호응해 주었다. 노래를 다시 이미지로 옮기기로 했다.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셋째를 뱃속에 품은, 꼭 민들레 같은 여성이었다.
이미지는 싹 트고 잎 나고 꽃 피고 지고 씨앗을 맺는 민들레의 한살이를 담기로 했다. 풀꽃의 한살이를 담는 일은 한 해를 담는 일이다. 한 번 그려 내는 데 꼬박 일 년이 지나간다. 입덧을 해 가며, 무거운 몸으로 한 번 그린 그림을 작가는 못내 아쉬워했다. 갓난아기를 키우느라 두 해를 쉰 오 작가는 다시 그림을 그리며 넷째를 품었다. 그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그 아이를 낳고 그림이 마무리되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이야기다. 생명의 이야기가 생명과 함께 품어지고 생명과 함께 자라 완성되었다.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책 한 권에도 몇 해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이 들었다. 하물며, 이 책을 펴내려 할 즈음 막 피어나는 초록 잎 같은 250여 아이들을 비롯하여 300이 넘는 생명이 허무하게 스러져 간, 비참하고도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명백히 기성들이 용인한 세상의 잘못이다. 이 나라의 성인 된 자로서 책을 내는 일조차 부끄럽고 미안하고, 분하고 참담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도 일상은 일상이라 자위하며 일주일 뒤 책을 냈다. 책에겐 미안하나 기쁘지 않았다.

꽃이 져도 민들레 / 씨가 맺혀도 민들레 / 휘익 바람 불어 / 하늘하늘 날아가도 / 민들레는 민들레…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다. 너무나 많은 꽃들이 너무나 아프게 졌다. 졌으나마 그저, 더는 생존과 자존이 위태롭지 않은 좋은 세상에 다시 피어나길 간절히 빈다.
남은 일은 산 자들의 몫이다. 꽃 진 뒤 맺히는 민들레 씨앗처럼 이 반성, 이 분노, 이 자각으로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저 강고한 권력, 배금과 기득의 콘크리트 벽 틈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연대하여 균열을 내야 한다. 끝내 부수고, 모든 아이와 모든 어른들이 언제 어디서든 자기다움을, 자기다움의 존엄을 지키고 살아가는 세상을 열어야만 한다. 그래야, ‘민들레는 민들레’다.

‘탁’ 둘, ‘대박!’을 외치던 그 사람 – <수박이 먹고 싶으면>

우리는 참 신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먹을 것, 내가 입을 것, 내가 깃들 것을 내가 차리고 만들고 짓지 않아도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세상. 연필 한 자루에서 자동차에 이르는 물건들, 세탁•청소•미용•운송 따위 온갖 생활서비스들까지 내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세상. 너무 익숙해서 당연한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마법 같은 일이다. 마법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분업과 화폐. 저마다 한 가지 일만 하고도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로 하여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 내가 누리는 것을 만들고 행하는 타인의 노고, 선한 동기와 정성스러운 과정들. 그 소중한 가치들이 화폐라는 수단에 가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새 수단을 목적으로 치환하는 우를 범하고, 나아가 동기와 과정의 가치를 비웃고 수단과 목적에 집착하는 ‘물신숭배’의 광신도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문화인이건 정치인이건….
2014년 벽두, 기자회견을 하는 대통령의 입에서 경악스런 말이 튀어나왔다. 연습이라도 한 듯 갑자기 오른손 날을 세워 아래위로 세차게 흔들며 내던진 말은 바로, “통일은 대박”. 맞게 들은 것인지 귀가 의심스러웠다.
까닭 하나, ‘대박’이란 어떤 말인가. 진심이나 선의처럼 가치로운 동기나, 성실과 정성, 노력과 같은 수고로운 과정을 배제한 채 한 탕 크게 벌겠다는 속물적 욕망이 번들거리는 시정의 말이 아닌가. 그런 말이 일국의 대통령 입에서 나오다니!
까닭 둘, 그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 왔던가. 아니, 통일을 바라기나 하는가. 식민-분단-전쟁 그리고 냉전의 고착으로 이어져 온 지난한 현대사는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과제와 태도로 우리에게 얼마나 복잡한 방정식과 얼마나 진심어린 열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는 대체 어떤 지혜와 열정을 보여주었는가? 오히려 그는 이념몰이와 긴장의 조장 같은 반통일적 행태로, 분단을 이용해 권력을 지켜온 극우의 아이콘 아닌가?
지나치게 황당한 사태는 한 동안 사고를 멎게 만든다. 그저 어이없는 며칠, 부아가 치미는 또 며칠을 보낸 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작가는 작품으로!’ 그가 들을 리 없으나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대박’이라 하니 나는 ‘수박’이라 하겠소. 높은 ‘권좌’에 앉아 말했으니 낮은 땅에 엎드려 일하는 ‘농부’의 입으로 말하려오. 한낱 수박 한 덩이를 얻고자 해도 얼마나 땀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지, 얼마나 세심히 때를 맞춰 지루하고도 자잘한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 그렇게 얻은 결실을 어떤 마음으로 누구와 나누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누구처럼 입으로만 할 수는 없지. 태생이 백면서생이니 공부를 해야 했다. 평생 가운데 농촌에서 보낸 몇 년의 세월과 몇 번의 주말농장 경험을 죄다 불러내 글로 배운 것과 합치시켰다. 당연 그것으론 모자라지. 한 해 동안 작업실 베란다 상자텃밭에 수박을 길렀다. 또 한 해 동안 근교에 밭을 얻어 수박 농사를 지었다. 전북 고창의 수박명인을 찾아가 조언과 검증을 구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그 모든 과정을 그림을 그린 유리 작가가 함께했다. 아니, 나는 먼저 글을 내어놓았을 뿐 그 뒤로 유리 작가가 힘찬 필치로 그것에 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하는 과정을 내가 함께한 것이 맞다.
그사이 그는 정체를 파악한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 감옥에 갔으니, 내가 청와대로 이 책을 부칠 일은 없어졌다. 허나 작업이란 작품을 향해 가는 순간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니, 어이없고 부아 치밀던 창작의 동기는 그저 동기였을 뿐이다. 그 뒤로는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보편적인 진실을 나누기 위한 하나의 텍스트가 되기를 바랄 뿐. 생각해 보니, 책 속 농부님의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아름다운 동기로 정성껏 사시게. 땀 흘려 거뒀거든 두루 나누시게.” 발상의 자극을 준 그이에게 감사드린다. 교도소에서 노역의 영광을 누리게 되거든 부디 농사짓는 일을 선택해 보시길…

‘탁’ 셋, 굴뚝 위의 두 사람 – <하늘에>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무너진 편서풍의 벽을 뚫고 북극냉기가 내려와 머물고 있는 현상’이라 했다. ‘역설적인 추위’였다. 2018년 1월 26일, 서울지역 아침최저 -18도, 체감기온은 -25도. 칼바람 부는 목동열병합발전소의 지상 75미터 굴뚝 위 좁디좁은 하늘에 두 사람이 76일째 스스로 갇혀 있었다.
2014~5년 차광호 씨에 이은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 박준호 씨의 두 번째 ‘굴뚝농성’. 복잡한 사연을 다 옮기긴 어렵지만, 요약컨대 미심쩍은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돌려달라는 농성이었고, 돌려주마고 했던 기업주에게 약속을 지키라는 농성이었다. 시비야 엇갈릴 수 있다 해도, 강약을 따지자면 걸 것이라곤 목숨 밖에 없는 쪽이 절대 약자요, 약자가 말 좀 들어달라며 목숨을 걸었을 땐 누구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세상은 무심했고, 그러니 사측은 꿈쩍하지 않았다.
나의 안녕한 일터에서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성산대교를 건너다보면 저기 그 굴뚝이 바라다보인다. 나 또한 종일 무심하다가,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그날 그 추위에 더 죄스러웠으리라. 추운 사람들을 위해 성냥불 하나 보태지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하는 것뿐. 페이스북에 그 처연한 풍경을 옮겨 적었다.

“하늘에 / 나뭇잎 흔들린다 / 하늘에 / 풍선이 올라간다 / 하늘에 / 새가 날고 / 하늘에 / 구름이 흘러가고 / 하늘에 / 비행기가 지나간다 // 어디로 가는 걸까? // 하늘에 / 노을이 붉다 / 하늘에 / 검은 밤이 온다 / 하늘에 / 달이 뜨고 / 하늘에 / 별이 반짝이고 / 하늘에 / 바람이 분다 // 어디서 오는 걸까? // 하늘에 / 철탑이 있다 / 하늘에 / 광고판이 있다 / 하늘에 /크레인이 있고 / 하늘에 / 굴뚝이 있고 / 하늘에 / 사람이 있다 // 왜 거기 있는 걸까?”

이 글은 그림책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글로부터 시작해 그림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보통 1년 이상 걸리는데, 글 속의 현실이 그때까지 유효해선 안 될 테니까. 그런 책이 필요치 않아야 좋은 세상이니까.
그러나 좋은 세상은 멀기만 했다. 그들보다 두 달 먼저 고공농성을 시작한 전주 시청 광장 조명탑의 택시노동자 김재주 씨가 여전히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고, 굴뚝 위에서도 얼마나 더 외쳐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졌다. 고작 그림책 한 권이 얼마나 힘을 보탤 수 있을까마는, 세상에 없어야 좋을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역설적 선택’을 하게 되었다.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의 매체에 그림을 그리던 우영 작가가 그림을 맡았다. 그림을 그리며 한 해가 지난 2019년 1월 10일 홍기탁, 박준호 씨가 426일 만에, 같은 달 26일 김재주 씨가 510일 만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세계최장 고공농성 1,2위, 우리 사회의 참담한 기록이었다. 책이 지닌 시의성은 사라져도 좋으니, 하늘에 사람이 오르는 일은 그것으로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헛된 바람이었다. 다섯 달 뒤인 6월에는 삼성항공 김용희 씨가 강남역 통신탑 위로, 또 한 달 뒤인 7월에는 영남대병원 박문진, 송영숙 씨가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책은 글을 쓰고 2년 뒤인 2020년 2월에야 세상에 나왔다. 굴뚝 위의 두 사람이 지상으로 내려온 뒤로도 1년여가 지난 뒤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하늘엔 여전히 사람이 남아 있었으니, 없어져야 좋을 ‘시의성’은 참 끈질기기도 했다.
<하늘에>를 출간하고 석 달 뒤 강남역의 김용희 씨를 끝으로, <하늘에>가 만들어지는 동안 하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노동을 둘러싼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숱한 산재사망사고와, 그럼에도 난항을 겪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문제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언제든 또 어떤 노동자가 하늘에 오른대도 이상할 일이 없는 현실이다. 그때 누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들과 눈을 맞출 것인가. 책의 뒤표지에 이런 글을 적어 넣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보려면 / 고개를 젖혀야 한다 / 눈길 닿지 않는 저곳은 높디높은 곳 // 저곳은 바람도, 중력도 다르단다 / 사랑도 평화도, 행복도 다를 게다 // 외로운 사랑, 위태로운 평화, / 추운 행복 // 이곳에서 사람을 보려면 / 고개를 숙여야 한다 / 눈길 닿지 않는 저곳은 낮디낮은 곳 – <굴뚝 앞에서> 전문

‘탁’ 넷, 겨울 아침에 마주친 나무의 본모습 – <겨울 나무>

피카소가 ‘새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칭송했던 이탈리아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는 그가 지은 책 《나무를 그리다》에서, 나무를 그리는 방법으로 줄기와 가지 그리기를 시종일관하게 제시한다. ‘옛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나무 드로잉 또한 시선을 줄기와 가지에 집중하고 있다. 나무를 나무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 바로 줄기와 가지가 이루는 형태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무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한 시절 꽃에 눈길을 주었다. 2월의 매화에 취했고 3월의 목련과 4월의 벚꽃에 매료되었다. 한동안은 열매에 마음이 끌렸다. 푸른 매실과 빨간 앵두, 발그레한 살구며 주황빛 감 따위를, 다가올 노년의 시골집 마당에서 거둘 것들의 목록에 올리며 가슴 설레곤 하였다. 잎 또한 내가 떠올리는 나무의 주된 이미지였다. 걸음마처럼 연둣빛이 오르는 4월의 산과, 깊이를 모르도록 짙푸른 여름의 숲, 보는 이의 얼굴까지 달아오르게 하는 붉디붉은 가을의 단풍…
그러나 허겁지겁 살던 시기를 지나 제법 관조의 시선을 얻게 되면서부터, 가려졌던 줄기와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싱그럽고 향긋하고 달콤한 꽃과 잎과 열매들, 허나 그것들은 때가 되면 떠나고 말 테니, 서리 지고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제 자리 제 모습을 지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내고 받치고 키우던 가지와 줄기와 뿌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꽃도 잎도 열매도 떠나보내고 그 자체로 남은 줄기와 가지가 바로 ‘나무’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뭇 간절해진 건강을 챙기고자 차를 버리고 전철과 두 다리로 출근을 시작하던 그해 겨울, 홍대역에서 가좌역까지 이어진 경의선 숲길을 걷다가, 문득 어느 나무 앞에 서서 나는 이렇게 썼다.

꽃 핀 적엔 보지 못했네 / 꽃 잔치 받치던 잔가지들 // 잎 난 적엔 보지 못했네 / 뻗으려 애쓰던 가지의 끝들 // 굳건하던 줄기와 억센 뿌리들 // 단풍 들고 낙엽 지고 서리 내리고 / 꽃도 잎도 열매도 떠난 / 겨울, 지금에야 나는 보았네

그리고, 내고 받치고 키우느라 겪어야 했던 고통의 흔적들,

푸르던 그늘 아래 벌레 먹은 자리들 / 가지를 잃은 상처들 / 상처마다 무심한 딱정이들 // 얼마나 줄기를 올려야 하나 / 어디쯤 가지를 나눠야 할까 / 머뭇거리던 시간들 // 견디다 견디다 살갗에 새긴 깊은 주름들

바로 그것, 꽃과 잎과 열매 뒤에서 벌레 먹고 상처 나고 딱정이 앉은 몸뚱이, 아무렇지 않은 듯하였으나 말없이 번민하던 흔적을 깊이 새긴, 주름진 그 몸뚱이가 바로 나무였던 것이다. 깨닫고 나니 또 다른 것이 보였다. 발그레 빛나는 나무의 살갗.

비로소 꽃도 잎도 열매도 아닌 / 저 나무가 햇살에 빛나는 것을 // 조용히 웃고 서 있는 것을

제 자신으로 빛나는 것이 겨울나무뿐이랴! 그 아침, 나무가 서 있는 거리에서 내가 정말로 만난 것은 나무에 비친 어떤 사람 –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내거나 받치거나 키우거나 지키느라 그것들에 가리어져 있다가, 비로소 제 모습을 되찾은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었으리라.
그가 어찌 자식들 다 키워내고 홀가분해진, 나이 든 이들이기만 할까. 자기를 가장 자기답게 하는 줄기와 가지, 그리고 뿌리에 충실하고자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그러니 ‘겨울, 나무’는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어떤 이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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