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권력도 거스를 수 없는 것 <커다란 것을 좋아하는 임금님>

 

고려 문신 이곡이 말했다.
“…사람이 지닌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뭐가 있을까.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권력을 빌려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총애를 받고 귀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다들 본디 제 것인 양 여기고 끝내 돌이켜 생각해 보질 않으니
어찌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차마설借馬說〉, 《가정집稼亭集 권7》)

그림책 속에 꼭 그렇게 어리석은 이가 있다. 《커다란 것을 좋아하는 임금님》.
이 친구는 실은 커다란 것‘만’ 좋아한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커다란 칫솔로 이를 닦고, 커다란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커다란 접시에 커다란 포크와 나이프로 음식을 먹는다.
후식 초콜릿도 아주 커다란 것을 대령하게 해서 조금씩 핥아 먹는데,
그러다 충치가 생기자 징징 울면서 아주 커다란 집게를 만들게 하여 그것으로 이를 뽑는다.
주치의가 땀을 뻘뻘 흘린 건 당연한 일.

임금의 편향증은 극에 이르러 급기야는 백성들을 동원해 커다란 연못을 파고,
커다란 낚시를 드리워 아주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싶어 하니,
미련한 신하들이 커다란 고래를 잡아와 커다란 낚싯바늘에 걸어 준다.
연못을 파 낸 흙으로는 커다란 화분을 만들고 빨간 튤립 알뿌리 하나를 심어 놓는다.
그러고는 날마다 화분을 바라보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다.
‘화분이 크니까 틀림없이 아주아주 커다란 튤립이 필 거야.’

이런 위정자가 어찌 이야기 속에만 있을까?
제 권세를 믿고 제가 좋아하는 짓만 하려드는 자들.
그들은 제 눈에 드는 사람만 가려 쓰고, 제 맘에 들지 않는 자는 주저 없이 내친다.
만나고 싶은 자만 만나려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함부로 혈세를 동원하고 마구잡이로 국토를 파헤친다….
현실에 이런 권자들이 드물지 않다. 그런데 그들의 권세가 본디 자기 것인가?
700년 전 왕조시대에 국록을 먹던 이의 인식도 위에 적은 바와 같은데.

이곡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혹 잠깐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이니,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빌려 쓰고도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인용한 맹자의 말에서 역성혁명론의 싹이 돋는다.

그러나 그림책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봄이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화분에서는 아주 작고 귀여운 튤립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그 어떤 권력도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이 그림책을 지은 안노 미쓰마사는 임금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듯하다.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의 마음도 그와 같을 터.
커다란 화분 속에 꼿꼿이 서 있는 빨간 튤립 한 송이가 당황한 임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