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a Single Jujube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
들꽃 한 점에서 천국을 보니 /
네 손 안의 무한을 움켜쥐고 /
순간 속의 영원을 놓치지 말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 부분)

“먼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고 /
낱낱의 먼지가 다 그러하니 /
영원이 곧 순간이요 /
순간이 다름 아닌 영원이라네.”
(의상, ‘법성게’ 부분)

먼 나라의 시인은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았고, 먼 옛날의 스님은 먼지 한 톨에서 우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땅의 시인이 가을, 가지 끝에 달린 대추 한 알을 들여다봅니다.
시인은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장석주, <대추 한 알> 전문).

어떤 이는 값을 떠올리고, 어떤 이는 건강을 생각하며, 대부분은 그냥 입에 침이 고일 대추 앞에서,
시인은 태풍과 천둥과 벼락의 개수를 세고, 무서리 내리고 땡볕 쏟아지며 초승달 뜨고 진 나날들을 헤아립니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그것들이 불고, 울리고, 치고, 내리고, 쏟아지고, 빛나던 시간들.
그것은 자연이니 곧 세계이며 우주이어서, 먼 나라 시인과 먼 옛날 스님이 모래 한 알과 먼지 한 톨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시인은, 어떻게 해서 그것을 보게 되었는지 슬쩍 일러줌으로써
그 세계, 그 우주를 한결 구체적으로 사뭇 달리 느끼게 해 줍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있을까?’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 있을까?’
대추가 가을이면 영글어 붉고 둥글어진다는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대추는 태풍과 천둥벼락, 무서리 땡볕을 견뎌낸 놀라운 존재가 됩니다.
비와 바람과 햇빛 달빛, 그리고 세월의 축복을 받은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나아가 그 모든 것과 인연을 맺은 관계 속의 존재가 됩니다.
그 시련과 축복과 그것을 주고받고 견디고 품는 인연 관계가 곧 우주의 내용이니,
얼핏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대추 한 알 속에 온 우주가 있는 것이지요.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요?
가족과 친구, 이웃과 동료, 그 숱한 인연 속에서 나날의 시련을 함께 이겨내고 축복을 함께 받으며,
한 해 또 한 해를 더불어 살아 내는 우리네 삶이야말로 온 우주를 품은 놀라움이 아닐까요?
시인은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간결한 언어의 행간에 길고 긴 이야기를 감추어 놓고, 누군가 읽어 내길 기다리지요.
먼저 읽어 낸 화가가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림 또한 시와 같아서, 이야기하되 모든 것을 말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와 그림이 만난 이 그림책을 ‘겹겹의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눈 밝은 독자 여러분이 읽어 주길 기다리는.

 

대추 한 알

장석주 시, 유리 그림 |12000원


작가 소개 : 장석주
글쓴이 장석주는 시인이고 독서광이며 문장노동자입니다. 산책, 음악, 햇빛, 바다, 대숲, 제주도를 좋아하고 서재와 도서관을 사랑합니다.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평론이 당선되었습니다. 책을 쓰고 만들고 펴내고, 문학과 책에 대한 강의를 하고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줄곧 책과 함께 살아왔으며, 지금도 읽고 생각하고 쓰기를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몽해항로》 등과 인문교양서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마흔의 서재》, 《일요일의 인문학》 등 80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작가 소개 : 유리
그린이 유리는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의 나지막한 숲으로 둘러싸인 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자연 속에서 농장의 동물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작가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에서 도자공예를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션학교 HILLS에서 그림책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습니다. 작품으로 《돼지 이야기》, 《수박이 먹고 싶으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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