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조연이어서 즐거웠다
<이까짓 거!> 편집자 기획노트

이야기 속엔 그 사람이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생각, 그의 마음, 말투도 습관도 때론 음성과 모습까지도 그의 이야기 속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그림책의 이야기 속엔, 박현주가 있다.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전에 말씀드린 기획안입니다. 초안을 잡은 지는 좀 되었는데 핑계가 많아 아직 이렇게 거친 상태입니다. 제 메일로 시간만 허비하게 되실까 살짝 걱정되네요~. 이 이야기의 의도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피하지 않는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저와 제 아이들에게 세상 살아가는데 깡다구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지난 해 4월, 그가 처음 이 그림책의 스케치와 함께 보내온 편지글이다. 겸손과 배려가 섬세하다. 그러나 할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용기’나 ‘결기’ 같은 점잖은 말 대신에 ‘깡다구’라 말해 버리는 깡다구도 느껴진다. “비 오는 날,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우산 없는 아이를 봤어요. 같이 갈까 물었더니 엄마 올 거라고,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엄마가 안 올 것이 분명한데, 눈길을 피하면서…” 이로부터 몇 달 전, 그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 아이가 자꾸 마음에 남네요. 제가 어렸을 때 그랬거든요.” “현주 씨는 그때 어떻게 했어요?” “몰라요, 그건 기억나지 않아요.” 함께 웃고 말았지만, 어린 박현주는 필경 이 그림책 속 아이처럼, 결국엔 빗속을 달렸을 것이다.

이야기 속엔 문제가 있다. 겪어 본 문제, 겪을지도 모르는 문제… 대개 그것은 피하고 싶거나, 왜 그렇게 대처했을까 후회되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 상황 속의 주인공을 지켜보면서 그에게 나를 비춰 이런저런 궁리를 함께 해 본다. 그러다가 끝내 문제에 치여 버린 그를 보며 함께 슬퍼하고, 잘 이겨낸 그를 보며 함께 기뻐한다. 슬픔은 곧잘 문제의식과 각성을 끌어내고 기쁨은 대개 용기와 희망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의 경우는 어떤가.

이 그림책의 줄거리는 원고부터 완성작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고의 정서는 다소 처연했다. 다섯 장면에서 되풀이되는 “비가 온다.”라는 진술, 역시 《비가 온다》라는, 주어를 상황에 맡겨버린 제목이 빗속을 달려가는 맺음의 활기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편집자의 일은 거기에 있었다. “‘비’를 주체로 놓는 건 처음 딱 한 번만, 그리고 주인공에 게 ”이까짓 거!“라고 말하게 합시다.” 더하여 처음엔 거짓말이었던 “괜찮아요!”가 나중엔 정말이 되도록.

“근데 ‘이까짓 거’는 제 말 아닌 생경한 느낌이 들어서… 작은 뉘앙스 차이가 저한테는 오른쪽 신발 왼쪽에 신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 고집 없는 거 잘 아시죠?^^::”

‘박현주’다운 반응이었다. ‘고집 없다’라는 자평은, 실은 ‘열린 마음’의 겸손이다. 종종 조연의 역할이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다. ‘준호다. 작년에 같은 반.’ “홍준호! 너도 우산 없어?” 이 그림책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불리는 준호가 그렇다. “넌 안 가냐?”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지며 곧장 빗속으로 뛰어드는 아이. 준호가 있어 주인공이 머리 위로 가방을 쓰고 빗속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체는 역시 주인공이다. ‘비? 별 거 아니네. 데리러 올 사람 없는 것도 별 거 아냐. 이까짓 거!’ 깨달음의 주체가 주인공이니까.

소심하고 여린 아이, 하지만 결국 ‘깡다구’를 발휘하는, 그래서 또 다른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라 빗속을 달리게 하는 ‘핫핑크의 소녀’. 그가 이야기 속의 그 사람, 박현주다. 그의 조연이어서 즐거웠다.

김장성 : 이야기꽃 대표

이까짓 거!
박현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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